초반부를 읽을때만 해도 열다섯의 어린 학생과 삼십대 여자의 충격적 사랑의 모양새에, 그것도 육체적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어 흥미 위주로 그린 책이라 생각했다. 사실 미하엘과 한나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게 되는 처음 과정은 어떻게 보면 역겹고, 한나라는 인물에 대해서 반감을 가질 정도로 이해가 안되는 장면이기는 하다. 그 부분을 읽을때만 해도 한나라는 여인은 젊고 순진한 어린 청년을 잠자리 상대로만 즐기는, 아주 천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부터 한나는 미하엘에게 관계를 하기 전에 꼭 책을 읽어주기를 요구한다. 책을 읽으며 흐름을 따라가는 일은 꽤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그 동안 미하엘도 들끓던 욕망이 진정이 되곤 했다. 한나는 미하엘이 낭독해 주는 책을 들으면서, 직접 참여하여 격하게 반응하며 자기 의견을 말하다가도, 어느 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책에 집중한다.
책을 어느정도 읽어주고 나면, 둘은 사랑을 하고, 그 후에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 '의식'이 반복되었다. 
 
 
이 책은 미하엘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줄줄 써내려갔기 때문에 읽다보면 마치 내가 미하엘이 된 듯 하다. 한나는 미하엘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고 자신에 대해 말을 하지도 않는다. 사랑하면 상대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데, 한나를 보며 역시 미하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싸울 일이 생길 때는 미하엘은 한나를 잃을 까봐 겁이 나서 굴욕적으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매번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과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어리고 순수했기 때문에. 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하엘이 학교로 돌아가 진급도 하고, 또래 학생들이랑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가끔 한나를 찾아가는것을 잊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열정스런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점점 한나가 꺼려졌던 것이다. 미하엘이 한나를 멀리하기 시작할 즈음, 한나가 떠난다. 한마디 말도 없이. 미하엘은 자신이 한나를 '배반'했기 때문에 한나가 떠났다고 생각하고 괴로워 한다. 아주 오랫동안 미하엘은 한나가 자신 때문에 떠났으리라 죄책감에 괴로워 한다.
 
 
 
미하엘은 한나를 매우 사랑했음에 틀림없다. 나이와 사랑한다는 행위는 별로 관련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관련이 있을지 모르나,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그 자체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한나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하엘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이 책 전체에 너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던 미하엘은 대학생이 된 이후에, 법정 세미나에 참석해서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는 한나를 만나게 된다.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미하엘을 마취된 상태로 이끈다. 미하엘 뿐 아니라 법정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마취된 상태로 만든다. 처음에는 자극적이고, 감정이 복받쳐 오르거나 분노가 솟거나 하던 법정이 재판 횟수를 거듭할 수록 사람들에게 점점 덜 자극적이고, 평범해진다. 상황이 자신과 관련없는 양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고, 그러므로써 판단하는데 점점 잔인해 진다.  한나에게 퍼붓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한나가 점점 불리해지게 만들었다. 재판을 지켜보는 미하엘의 의식 흐름을 따라가며 느낀 것이, 누구의 죄를 판단하고, 기소하는 따위의 일들, 즉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단순화 시키는'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주 그런 단순화 작업이 사람의 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추궁하고 지치게 만드는데 지나지 않기도 한다.
미하엘이 나중에 법관이나 변호사가 아닌 법제사란 직업을 택하게 된 이유도 이 단순화 시키는 일이 자기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쨋든 재판의 내용은 계속 한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으나, 한나는 진실만을  말하려고 고집스럽게 노력했다. 나치 강제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한나는 교회에서 수감자들이 갇혀 불에 타 죽은 일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하며 재판을 받는 상황이다. 한나는 교회 문을 열어주면 수감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릴까봐 겁이 났고, 어쩔 줄 몰라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남자 감시원들이 갑자기 사라진 상황이라 몇 안되는 여자 감시원들이 그 많은 수감자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들은 어차피 많이 허약해져 있어 곧 죽을것이라 생각했다는 말도. 정말 정직하게, 진솔하게 말한다.
 
 
 
그런데 법정은 이런 진술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눈치다. 그들 또한 전후 시대에 있어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겪고 나서도, 친일파들이 여전히 권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민들이 이를 알면서도 넘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법정에 있는 재판관들 뿐 아니라 교회에 불이 났을 때 목격한 마을의 사람들 역시, 모두 치명적인 질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마을의 목격자 중 아무도, 교회 안에서 타 죽는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구경만 했기 때문이다. 모두 서로의 죄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그것을 한나라는 사람을 통해 분노로 표출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한나는 재판관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럼 어떻게 했겠어요?' 라고.
일순 법정을 긴장시키는, 그 뼈 있는 질문. 판사는 그에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황은 한나에게 점점 더 불리해진다. 심지어 나머지 피의자들도 합세해 거짓말을 하며 한나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
 
 
 
마지막에 한나는 딱 한번 거짓을 말한다. 그것은 그녀 평생의 치부에 관한 것이었고, 거짓을 말한것은 그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문맹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판을 위해 자료를 읽을 수도 없어 미리 준비하지도 못했고, 어쩔 수 없이 강제수용소 감시원 일을 하게 된 것도 다 그녀가 문맹이었으며, 그것을 매우 수치스러워 하고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했던 이유이다.
자기 스스로의 위엄... 이라고 말해야 할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그것을 밝히면 자신의 무죄가 입증 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는 미하엘은 그녀가 얼른 밝히기를 바라나 그녀는 끝까지 그러지 않는다.
 
 
 
한나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미하엘은 끊임없이 한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그 당시 강제수용소가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한 자료나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한나가 강제수용소에서 몰인정한 감시원 역할을 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으며 매우 제한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자리잡게 했다. 자신이 원래 알던 한나의 아름답고 젊은 모습과, 그 부정적인 모습이 서로 겹치면서 그는 괴로워 한다.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그녀의 범죄에 합당한 유죄판결을 결코 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범죄에 합당한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도 남아있지 않았다'라고 미하엘은 말한다.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를 또다시 배반하는 것이라고...
 
 
 
 
미하엘의 이 의식 흐름이 왜 이렇게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이해할 근본적인 자료나 기억, 정보도 없는걸 느꼈을때의 기분. 미하엘은 참 오랫동안 한나에 대해 생각하고, 시달리고,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생각에 가끔 지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마치 자신과는 동떨어진 일인 양 마취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미하엘은 한나가 수감된지 8년째 되던 해부터 그녀에게 책을 읽어 녹음해서 소포를 보내기 시작한다. 10년동안 한나는 미하엘이 보내준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해서 글을 조금씩 익혔으리라. 어느날 그녀에게서 짤막한 편지가 돌아왔다. 그녀가 드디어 글을 쓸 수 있게 된것이다. 그때 미하엘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찾아가지도, 답장을 쓰지도 않는다. 아마 추억 그대로 남겨두고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어느정도 남의 일인 양 객관적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싶었고, 다시 그때의 힘들었던 일과 생각과 그 분위기의 소용돌이 중심에 놓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속으로 빠지기가 두려웠으리라~
 
 
한나는 사면회로부터 사면이 되어, 출소를 앞두게 된다. 그리고 미하엘과 만나게 되는데 뚱뚱하고 나이가 들어버린 한나의 모습에 미하엘은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느꼈으리라. 출소하기 하루 전날 한나는 자살을 해버린다.
 
 
한나의 인생이 참 기구하고, 요령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철학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도 만들었다. 정말 내가 한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헸을까?
너무 일찍 평생 가슴에 남을 아프고 진한 경험을 해 버린 미하엘이 안타깝기도 했고... 그 흔적 자체가 미하엘의 인생을 이루는 구성이 되리라.
 
 
 

 
평소 철학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의 흐름을 읽다 보면 공감할 때가 많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본 나로서는 이 책의 주인공 미하엘의 마음이 조금은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지만, 비교적 잘 읽혔던 것 같다. 그래서 공감할 수 있었고~
 
 
철학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조금 우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미하엘의 경우처럼, 인생에서 어떤 강렬하고 중요했던 일, 가령 사랑이나 어떤 사건... 따위는 개인에게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긴다. 평생이란 시간을 걸쳐 일어나는 이 사건들이 곧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낸다. 마취된 상태처럼 자신의 일이 아니고 먼, 남의 일처럼 느껴지다가도, 기억 조차 나지 않다가도 어느새 당장 눈앞의 일 처럼, 현재의 생생한 느낌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렇게 멀었다 가까웠다 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점점 변화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
 
 
 



며칠 전 우연히 질 테일러 볼트의 TED 강연 MY STROKE OF INSIGHT를 보는 중에 깜짝 놀랐다.

뇌과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제 사람의 뇌를 가지고 나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처음으로 생생하게 진짜 사람의 뇌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었다. 



 MY STROKE OF INSIGHT 듣기




그런데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날 더욱 새로운 충격에 빠트렸다. 



평생 뇌과학자로 일해 온 그녀가 어느날 아침 좌뇌의 출혈, 즉 뇌졸중을 겪고 느낀 통찰은 신기하고 영적인 것이었다.

너무 놀라워서 이후 그 이야기를 기록한 책 '긍정의 뇌'를 읽어보았다. 



우리의 좌뇌와 우뇌는 매우 성격이 다른 두 아이라는 것. 

좌뇌는 자아, 사물의 경계, 생각, 언어를 관장하고 우뇌는 에너지, 이미지를 담당한다는 것. 

그래서 어느날 아침 뇌출혈로 인해 좌뇌가 망가져가고 있을 때, 즉 그녀 머릿속의 재잘거림, 생각과 자아,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롯이 우뇌, 즉 이미지와 에너지만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접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마음이 평화롭고 충만하고 따뜻했는지를 적고 있다. 그녀는 강연에서 이를 불교의 '열반' 같았다고 설명했다. 

경계가 없고 오로지 에너지만이 존재하니, 그녀 주위의 모든 분자로 이루어진 물건들이 거대한 에너지로 다가왔단다.

그리고 그녀 역시 거대한 에너지일 뿐, 무엇이 '나'고 무엇이 내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겉모습의 자신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걸 느꼈단다.






요즘 달라이라마, 틱낫한, 에크하르트 툴레 등 영성가들이 쓴 책에 관심이 가서 흥미롭게 읽던 터라, 

그녀의 이야기가 영성가들이 이야기하는 부분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걸 알았다.




불교에서 화두로 삼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그녀는 그날 경험으로 체험한 것 같았다.



내 머릿속의 생각, 재잘거리고 있는 존재가 사실은 내가 만든 자아일 뿐... 

그 것을 넘어서는 더 크고, 연결되어 있는, 광활한 바탕이 있다는 이야기...

그걸 일컫는 단어는 종교마다 다르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우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좌뇌의 재잘거림을 재우고, 우뇌의 역할을 발현시켜 충만함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하튼 이 책을 읽곤 어느날 마음 잡고 알람을 한시간 맞춘 후에 명상을 해보았다.

나비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나는 처음으로 아주 '편안하게' 47분간 명상을 했다. 아빠가 돌아오셔서 인사를 해야하기 전까지.

그리고 명상을 해본 이래 처음으로 내 안의 에너지같은 것을 느꼈다.

내가 지금 어떤 손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앉아있는지 경계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었고 

몸 안쪽에서 따뜻한 파동이 있는 무언가가 일렁~ 일렁 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분명한 점은, 그걸 느끼고 나서 갑자기 나에 대한 따뜻한 마음, 사랑스러움, 연민, 자랑스러움, 평안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는 사실이다..

자존감에 대한 책을 읽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나에 대한 사랑스러움?을 느끼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날 명상으로 하루 정도는 처음으로 나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고 내가 힘이 있는 존재,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도 명상을 꾸준히 해 볼 생각이다. 

의식적으로 원하는 때에 내 안의 에너지와 바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충분히 계속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 김승호

 

 

4장 조금은 느슨하게 함께하는 삶에 대하여

 

 

쓸데없이 칫솔질하면서

흘려보내는 물을

내 몸 중 일부를 하수구로 버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종이 한 장이 이유 없이 구겨진 채 버려지는 것을

나무의 한 생명이 제값 못하고 사라지듯

아까워해야 한다.

라면박스에 들어 있는 나무젓가락 한 개도

그 몫을 다하도록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나무가

죽어나가기 때문이다.

 

→ 사실 우리의 삶에서 평범하게 주어지는 많은 편의는 누군가 혹은 어떤 생명의 노력과 희생, 에너지가 담긴 것인데

너무 익숙하고 넘쳐나는 나머지, 그 편의를 단면만 보고 흥청망청 낭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던 글이다.

종이 한 장, 물 한 컵, 나무 젓가락 한 개... 모두 적은 돈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과연 '제 몫을 다하도록' 나는 잘 사용해 왔을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일회적으로 가치가 다했다고 쓰고 버려왔었지

하지만 너가 나고, 자연이 나고, 생명이 나고, 우주가 나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 몸 중 일부를 하수구로 버리는 것처럼

가치가 다하지 않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하수구로 버려왔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철학이나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나 스스로를 존중하는 태도의 문제다.

 

지극히 이타적인 행위가 지극히 이기적인 결과를 줄 수 있다는 원리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남을 사랑하고 배려할 이유가 충분하다. 바로 그가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동지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다.

 

영국의 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고 말했다. 관심 없다는 식의 태도를 빗대어 악을 저지르는 사람뿐 아니라 침묵하는 사람도 공범이라고도 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을 보면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인 위기에서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라고 했다.

 

1968년 어느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결국 우리는 적들이 남긴 말이 아니라, 동지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무관심과 묵인을 나무랐다.

 

→ 내내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불평만 하면서 정작 진정성 있게 알아보고, 관심 갖고, 나만의 시각을 정립하는 일에는 귀찮아해온 침묵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되어서..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싶으면 내가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하지도 않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으면 누군가 곧바로 뺏어간다. 내가 하지 않고 얻은 모든 것은 남의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으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행동하면 된다. 그래도 안 된다면 무엇을 더 바꿔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 이 글을 계속 읽었다.

참 단순하고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선 항상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서,

이 객관적인 문장조차 긍정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사실 맞다. 무슨 일이든 오래 좌절해 있을 필요가 없다.

무언갈 갖고 싶으면 살펴보고 결심하고 행동하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예외인 것 같지만 ^^

 

 

어린아이라도 남이 주는 음식은

입에 넣었다가 뱉는데,

남이 주는 생각을

덥석덥석 받아먹는 성인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받아먹기 시작하면

내 생각은 나를 대변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나의 생각을 나 스스로가 가지지 못한다면

누가 나를 존중하고 배려할 것인가.

 

내 스스로 판단하기 전에 외적인 환경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외부에서 오는 판단과 환경은 나를 망칠 수도 있고 나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고 믿지만 그러한 믿음은 위험하다.

그렇게 믿는 순간, 다른 사람이나 외부 환경의 정신적 노에로 추락한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외적인 환경이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가 허락할 때뿐임을 알고 인생의 지배권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참 나는 이런 부분이 약해서 오래 흔들렸던 것 같다.

타고 난 우유부단함.. 그리고 부족한 경험

20대야 다 비슷하지 않을까..

타인의 말에, 의견에 지배당해도 봤고, 다시 나와도 봤고,

다시 나와서도 무엇이 맞고 어떤 게 진실인지 항상 힘들어 했고...

서른즘 되니 이제 좀 주관이 생기는 것 같다.

그 느낌은 꽤 좋다.

앞으로는 오히려 너무 내 주관과 고집에 갇히지 않도록 조심해가야겠지.

 

 

솔직함이라는 가면을 쓴 무례함

 

'마음이 빠진 숨김 없는 바르고 곧음'은 날카로운 부엌칼과 같다.

상대를 위해 요리를 해줄 수도 있지만 깊은 상처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 와닿았던 이야기들인데

20대에 내가 인간관계에서 제일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어디까지 솔직하게 얘기해야 할까?"

내가 살아온 경험으론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솔직한 마음에 대해

어디까지 가감없이 말해주어야 할까?

다들 '솔직함'이 좋다고 하는데 솔직하게 얘기하면 상처를 주는 것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기준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말이 칼인지도 모르고 휘둘렀던 많은 시간들..

타인의 감정에 조금 둔했던 것 같기도 하고...... ㅜㅜ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솔직함이야말로 가장 주관적인 가치며 자신의 판단일 뿐이라고

내가 하는 말이 옳든 그르든 남에게 상처가 됐다면 따지지 말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누가 진작 좀 얘기해주지~

이제야 깨닫는 사실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 김승호

 

 

 

 

1장 부를 이루는 길

 

 

당신이 부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부의 소유자가 아닌 부의 관리자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부를 인격체처럼 생각하면 내가 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매 순간 혹은 모든 영역에서 저절로 답이 나올 것이다.

 

→ 부의 소유자가 아닌 부의 관리자..

신선하게 다가온다. 평소 사람들이 돈에 대해 생각하는 개념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부를 유지하기 위해

작가는 이를 생명체처럼 대하며 잠시 내 손으로 관리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란 명언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 부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새로운 부가 다시 들어올 지는 몰라도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부는 지나가는 것이니...

다 가진 것처럼 자만하거나 나를 뽐내는 데 사용하지 말고

많은 사람에게 혜택과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말.

그래야 새로운 부가 그 가치를 알아보고 다시 들어온다는...

신비스러운데?

 

 

 

모든 참된 성공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 강해지고 결속되며 가치를 지니게 된다.

애벌레가 번데기에서 탈피하지 않고서는 나비가 될 수 없다.

 

이 우주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든 흔들리며 간다.

빛조차도 중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휘어져 다니듯

 

누구든 고통을 벗어나 살아갈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고통 중에 상당히 많은 고통은 위장된 고통이다.

 

→ 언젠가부터 나비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보면....

약하지만, 아름답기 때문인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은 힘이 있다.

누구든 흔들리며 간다는데... 나는 너무 많은 시간 고통에 멈춰있는 게 아닌지...

나 혼자 힘든 게 아니다.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실패하면 더 나은 방법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기에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지만

멈추는 것은 명백한 손해다.

머리로는 아는데 왜 실천이 잘 안될까?

 

 

이제 꿈을 종이에 적으라.

꿈은 종이에 적으면 목표가 되고, 그것을 자르면 계획이 되고,

계획을 실현하면 현실이 된다.

목표를 작게 조각내어 매번 성공하라

그것이 버릇이 되면 어느새 큰 성공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 언젠가부터 꿈이라는 단어가 너무 멀다.

미래에 언젠가 이룰 것으로 자꾸 미루고 있다.

지금 현실에서는 도저히 길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어떤 신기한 방도가 번쩍 떠오르길 기다리는지도...

반성하게 된다.

 

 

두 줄 만으로

너무 센스있고, 따뜻하고, 좋았던 시가 있다.

 

 

벼룩

 

 

 

그대 벼룩에게도 역시 밤은 길겠지.

밤은 분명 외로울 거야.

 

 

 

 

 

진짜 너무 짱짱! 내 스타일이다 ㅎㅎ

벼룩. 몇년에 한번 우리 머릿속에 떠오를까 말까 한 단어

그만큼 존재감이 없는 생명체

그러나 그것에게도 밤은 길고 외로울 거야.

생명이란 다 비슷하니까...

 

 

아.

요즘 학생들이 수학, 영어 1점이라도 더 올리려고 피터지게 하는 대신

이런 거 한줄이라도 읽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얼마나 더 공감력있는 사회가 될까? ㅠㅠ

 

 

 

 

 

마음에 드는 시가 왜 이리 많은지... ^^

내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분들도 시만이 주는 좋은 느낌을 한번 느껴보고 가시길!

 

 

 

 

 

 

무덤들 사이를 거닐며

 

 

 

무덤들 사이를 거닐면서

하나씩 묘비명을 읽어 본다.

한두 구절이지만

주의깊게 읽으면 많은 얘기가 숨어 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이나

투쟁한 것이나 성취한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짜로 줄어들었다

살아 있을 적에는

지위와 재물이 그들을 갈라 놓았어도

죽고 나니

이곳에 나란히 누워 있다.

 

 

죽은 자들이 나의 참된 스승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으로 나를 가르친다.

죽음을 통해 더욱 생생해진 그들의 존재가

내 마음을 씻어 준다.

 

 

홀연히 나는

내 목숨이 어느 순간에 끝날 것을 본다.

내가 죽음과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보는 순간

즉시로 나는 내 생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남하고 다투거나 그들을 비평할 필요가 무엇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선물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시집을 난생 처음 구매해서 읽어보는데...

생각보다 시란 좋은 것이구나 하고 느끼고 있다.

 

문학소녀와는 거리가 먼 시간을 살아왔는데

시가 마음에 따뜻하게 와닿는다.

물론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시도 있지만... ㅋ

 

오늘의 시는 꼭 소개하고 싶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의 잠언 시집

류시화가 직접 지은 시를 수록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를 골라 엮은 책인데

잠언 시집 답게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단점은 시적인 느낌이 좀 떨어진다는 건데...

아직 시에 초보인 내가 읽기에는 조금 더 산문 느낌이 나는 게 이해하기가 쉽고,

또 수록 시들이 지향하는 바나 코드?가 나랑 잘 맞는 것 같아서 좋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새벽 두 시, 세 시, 또는 네 시가 넘도록

잠 못 이루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간다면,

만일 백 명, 천 명, 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물결처럼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예를 들어 잠자다가 죽을까봐 잠들지 못하는 여인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와

따로 연애하는 남편

성적이 떨어질 것을 두 려워하는 자식과

생활비가 걱정되는 아버지

사업에 문제가 있는 남자와

사랑에 운이 없는 여자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만일 그들 모두가 하나의 물결러럼

자신들의 집을 나온다면,

달빛이 그들의 발길을 비추고

그래서 그들이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그렇게 되면

인류는 더 살기 힘들어질까,

세상은 더 아름다운 곳이 될까.

사람들은 더 멋진 삶을 살게 될까.

아니면 더 외로워질까.

 

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만일 그들 모두가 공원으로 와서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태양이 다른 날보다 더 찬란해 보일까.

또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그들이 서로를 껴안을까.

 

 

 

 

 

 

 

 

 

사람마다 각자 상황과 경험에 따라 와닿는 시가 다르겠지?

나의 경우 이 시를 보고 든 생각이,

마치 심리치료에서 진행되는 심리상담이란 게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저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만약 가능하다면

심리상담사란 직업은 굳이 없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항상 나 자신의 문제보다 가볍게 다가온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면서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어딜 향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는다

혼자 안고 있으면 너무나 무겁고 길이 보이지 않던 문제가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재정비되고 객관적으로 보인다.

 

 

소통의 방법은 다양해졌지만, 깊이는 없어진 지금.......

짧은 시간 내에 첫인상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어필하는 법은 배우는 반면

천천히 제대로 소통하는 법은 배우지 못하는 지금...

 

 

학생도, 어른도, 노인도, 아이도 예전보다는 더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시가 좋았다. ^^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중략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사실 위 시에서 '평등한'이란 단어를 쓴 것이 많이 낯설게 다가왔다.

기쁨과 평등한 슬픔이라니... 단어가 좀 안어울리는 느낌이다.

작가에겐 평등이란 단어가 어떤 느낌인걸까?

 

 

내가 하늘 위에서 인간을 심판하는 자라고 엉뚱한 상상을 해 보면...

그저 자기의 기쁨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랑보다, 기쁨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려고 할까?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존재이기에..

나의 기쁨과 플러스가 곧 다른 누군가의 슬픔과 마이너스와 직결된다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이 많기에...

 

 

슬픔의 경험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키워주고

그래서 기쁨에 더 감사하고

기쁠 때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고

슬플 때도 곧 지나가리라 담담히 마음먹게 하지 않을까.

 

 

누가 시집을 선물해달라고 해서, 평소 문학소녀도 아닌 내가 이런저런 시를 읽고 있다.

그사람에게 어떤 시집이 어울릴까 생각하면서.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박준 작가의 시집을 읽고 있다.

 

 

열개 중 다섯개는 무슨 말인지 의아하고, 4개는 잔잔하게 다가오고, 한개는 확 꽂히는 듯

내가 문학소녀가 아니라 더 그렇다.

 

오늘 읽은 것 중에 제일 꽂힌 시는...!

 

 

 

 

 

 

 

 

이게 진짜지 말입니다 물광이 빛나니, 불광이 깨끗하니 하는 얘기는 이제 고향 앞으로 갓, 이지 말입니다 이건 물불을 안 가리는 광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용산역을 지나는데 말입니다 거짓말 아니고 말입니다 바닥에 엎어 자던 노숙자 아저씨가 제 군화 빛에 눈이 부셔 깼지 말입니다

 

 

....중략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흠집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지 말입니다 깊게 파인 흠집을 약으로 메우는 것은 신병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

....중략

 

 

 

 

흠집은 흠집이 아닌 곳과 똑같은 두께로 약을 발라야지 말입니다 벗겨져도 같이 벗겨지고 덮여도 같이 덮이는, 흠집이 내가 되고 내가 흠집이 되는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다 지난 휴가 때도 얼굴도 몇번 못 뵙고

 

....중략

 

 

 

 

그런데 김병장님 참 신기하지 말입니다 참말로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 이렇게 질기고 징하게 새카만 것에서 광이 낯짝을 살 비치니 말입니다

 

 

 

 

 

 

바닥에 엎어져 자던 노숙자 아저씨의 눈을 부시게 하여 깨게 만들만큼 밝은 빛이... 흠집이 내가 되고 내가 흠집이 되는, 벗겨져도 같이 벗겨지고 덮여도 같이 덮이는.. 그런 평범한 어우러짐 속에서 탄생한다는 이야기. 잘난 점만 갖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흠집을 갖고 사는 게 인생사..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한다?

감동적이야~~

-말입니다 하두 들으니까 가본 적도 없는 군대에 와서 후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