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중략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사실 위 시에서 '평등한'이란 단어를 쓴 것이 많이 낯설게 다가왔다.

기쁨과 평등한 슬픔이라니... 단어가 좀 안어울리는 느낌이다.

작가에겐 평등이란 단어가 어떤 느낌인걸까?

 

 

내가 하늘 위에서 인간을 심판하는 자라고 엉뚱한 상상을 해 보면...

그저 자기의 기쁨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랑보다, 기쁨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려고 할까?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존재이기에..

나의 기쁨과 플러스가 곧 다른 누군가의 슬픔과 마이너스와 직결된다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이 많기에...

 

 

슬픔의 경험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키워주고

그래서 기쁨에 더 감사하고

기쁠 때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고

슬플 때도 곧 지나가리라 담담히 마음먹게 하지 않을까.

 

 

누가 시집을 선물해달라고 해서, 평소 문학소녀도 아닌 내가 이런저런 시를 읽고 있다.

그사람에게 어떤 시집이 어울릴까 생각하면서.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박준 작가의 시집을 읽고 있다.

 

 

열개 중 다섯개는 무슨 말인지 의아하고, 4개는 잔잔하게 다가오고, 한개는 확 꽂히는 듯

내가 문학소녀가 아니라 더 그렇다.

 

오늘 읽은 것 중에 제일 꽂힌 시는...!

 

 

 

 

 

 

 

 

이게 진짜지 말입니다 물광이 빛나니, 불광이 깨끗하니 하는 얘기는 이제 고향 앞으로 갓, 이지 말입니다 이건 물불을 안 가리는 광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용산역을 지나는데 말입니다 거짓말 아니고 말입니다 바닥에 엎어 자던 노숙자 아저씨가 제 군화 빛에 눈이 부셔 깼지 말입니다

 

 

....중략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흠집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지 말입니다 깊게 파인 흠집을 약으로 메우는 것은 신병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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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흠집은 흠집이 아닌 곳과 똑같은 두께로 약을 발라야지 말입니다 벗겨져도 같이 벗겨지고 덮여도 같이 덮이는, 흠집이 내가 되고 내가 흠집이 되는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다 지난 휴가 때도 얼굴도 몇번 못 뵙고

 

....중략

 

 

 

 

그런데 김병장님 참 신기하지 말입니다 참말로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 이렇게 질기고 징하게 새카만 것에서 광이 낯짝을 살 비치니 말입니다

 

 

 

 

 

 

바닥에 엎어져 자던 노숙자 아저씨의 눈을 부시게 하여 깨게 만들만큼 밝은 빛이... 흠집이 내가 되고 내가 흠집이 되는, 벗겨져도 같이 벗겨지고 덮여도 같이 덮이는.. 그런 평범한 어우러짐 속에서 탄생한다는 이야기. 잘난 점만 갖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흠집을 갖고 사는 게 인생사..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한다?

감동적이야~~

-말입니다 하두 들으니까 가본 적도 없는 군대에 와서 후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