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1987: when the day comes (2017)

마음에드는/영화 2018. 1. 29. 23:44 Posted by thankful_genie

영화 1987: 그날이 오면

 

 

 

영화를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경우 일상의 반복과 바쁨에 눌려 소위 잡생각만 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진짜 '생각'을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게 영화이다.

1987의 경우 더욱 그 역할을 잘 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의 가치와, 그 과정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힘의 논리에 대해서도...

 

힘의 논리는 명백하고 예외가 없다.

어디로부터 비롯된 힘인가와 상관 없이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그것을 벗어날 길은 없다.

시대의 소용돌이를 비롯해...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사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존재할까?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서, 사회의 역할과 행동에서, 정치에서...

수많은 관계에서 우리는 힘이란 거대한 놈과 마주하고, 선택의 기로에 서서 괴로운 순간을 보낸다.

모든 사람은 평화롭고 행복하고 싶어 하는데도...

그런건 신경이나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놈은 우리에게 다가와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

1987년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불편하고 만나지않고 싶은 놈과 직면한 시간이었다.

인생에선 참, 이런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여하튼 그 불편한 놈을 직면했을 때, 우리 모두는 '선택'을 하는데

다수는 자신의 선택이 세상에 가벼운 영향을 주거나, 혹은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 중 한명, 티끌같은 자신의 '가벼운' 선택이 대체 무엇을 바꾸고,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느냔 말이다.

 

제일 쉬운 방법이다.

자신을 속이고 진실 앞에 얇은 가림막을 세우는 것...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점은 시간이 지나서 진실을 마주했을 때 세 배, 네 배로 괴로울 거란 사실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시간이 지나도 자기 반성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자기 합리화의 꺼풀을 벗겨내지 못하는 사람

차라리 본인을 속일지언정, 진실과 타인에 관심을 두지 않는 나약한 사람

오직 본인의 평안만을 생각하는 인간..

그런 인간은 전혀 괴롭지 않을 것이다.

 

 

나비효과, 홀로코스트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홀로코스트의 대표적인 사건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이다.

이후에 국제적으로 반성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면서(물론 이또한 승자의 법칙이지만)

유대인 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나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된 걸로 알고 있다.

 

학살의 과정에는 수많은 간수들이 참여했지만, 그들은 참으로 평화로운 선택을 했다.

자신의 이성과 생각을 마비시켰다. 이성이 끼어들려고 할 때마다

"위에서 시키는 것이니 선택에 나의 무게는 들어있지 않다"고 합리화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나의 역할과 선택, 행동의 영향력을 무시했기 때문에 대학살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떨까?

힘의 논리와 직면했을 때 우리의 선택은 어떨까?

그리고 1987년 수많은 연희와 누나, 삼촌의 선택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선택이 옳고 그른 것이라고 구분지을 수는 없다.

누군가에겐 가족을 잘 지키는 것이 선이고, 누군가에겐 타인이지만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게 선이다.

 

그래서 선택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택의 과정에서 우리 모두 전심을 다했을까?

나의 선택, 작은 행동이 세상에 끼칠 영향을 무시해버리진 않았을까...

그렇게 나를 속여서 마음의 짐을 덜진 않았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질문은

나라면..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과 행동으로 나의 영향력을 세상에 내보냈을까.

 

힘에 부딪힘을 선택하면 어떤 경우든 나는 반토막이 날 수가 있다. 그래서 두렵고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 데에는, 6.10항쟁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타인이 곧 나이고 내가 곧 타인이고, 그들을 사랑하고, 인간이자 생명으로서 연민하는, 공감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곧 힘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힘이 없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수많은 사람의 생각이 모이면 그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발휘한다고 믿는다.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시대를 펼친 주인공은 항상 뭉쳐진 약자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약자는 다수이고 권력을 가진 강자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약자 개개인의 '생각'과 '선택' 그리고 '행동'으로부터 진짜 변화가 비롯되어왔다.

단지, 인간은 너무 짧은 생을 살기에.. 그 과정을 선명하게 인지하기 힘들 뿐이다.

 

 

 

영화에선 정의와 진실을 선택한 수많은 개개인이 존재했다.

교도관장, 연희, 이한열 열사, 언론 기자들, 유가족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

덕분에 지금은 진실이 밝혀져 1987이란 영화로 부끄러운 시간을 뒤돌아볼 수 있고,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피로 쓴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던가...

국민이 주인인 나라,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준 지나간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또한, 평소에 갖고 있던 '진실'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조금 거둘 수 있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이야기는, 거짓말같아 보였는데...

이젠 부정도, 긍정도 안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힘이 무서운 만큼, 정의와 진실을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힘도 거대하니까...

 

 



며칠 전 우연히 질 테일러 볼트의 TED 강연 MY STROKE OF INSIGHT를 보는 중에 깜짝 놀랐다.

뇌과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제 사람의 뇌를 가지고 나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처음으로 생생하게 진짜 사람의 뇌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었다. 



 MY STROKE OF INSIGHT 듣기




그런데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날 더욱 새로운 충격에 빠트렸다. 



평생 뇌과학자로 일해 온 그녀가 어느날 아침 좌뇌의 출혈, 즉 뇌졸중을 겪고 느낀 통찰은 신기하고 영적인 것이었다.

너무 놀라워서 이후 그 이야기를 기록한 책 '긍정의 뇌'를 읽어보았다. 



우리의 좌뇌와 우뇌는 매우 성격이 다른 두 아이라는 것. 

좌뇌는 자아, 사물의 경계, 생각, 언어를 관장하고 우뇌는 에너지, 이미지를 담당한다는 것. 

그래서 어느날 아침 뇌출혈로 인해 좌뇌가 망가져가고 있을 때, 즉 그녀 머릿속의 재잘거림, 생각과 자아,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롯이 우뇌, 즉 이미지와 에너지만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접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마음이 평화롭고 충만하고 따뜻했는지를 적고 있다. 그녀는 강연에서 이를 불교의 '열반' 같았다고 설명했다. 

경계가 없고 오로지 에너지만이 존재하니, 그녀 주위의 모든 분자로 이루어진 물건들이 거대한 에너지로 다가왔단다.

그리고 그녀 역시 거대한 에너지일 뿐, 무엇이 '나'고 무엇이 내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겉모습의 자신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걸 느꼈단다.






요즘 달라이라마, 틱낫한, 에크하르트 툴레 등 영성가들이 쓴 책에 관심이 가서 흥미롭게 읽던 터라, 

그녀의 이야기가 영성가들이 이야기하는 부분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걸 알았다.




불교에서 화두로 삼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그녀는 그날 경험으로 체험한 것 같았다.



내 머릿속의 생각, 재잘거리고 있는 존재가 사실은 내가 만든 자아일 뿐... 

그 것을 넘어서는 더 크고, 연결되어 있는, 광활한 바탕이 있다는 이야기...

그걸 일컫는 단어는 종교마다 다르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우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좌뇌의 재잘거림을 재우고, 우뇌의 역할을 발현시켜 충만함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하튼 이 책을 읽곤 어느날 마음 잡고 알람을 한시간 맞춘 후에 명상을 해보았다.

나비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나는 처음으로 아주 '편안하게' 47분간 명상을 했다. 아빠가 돌아오셔서 인사를 해야하기 전까지.

그리고 명상을 해본 이래 처음으로 내 안의 에너지같은 것을 느꼈다.

내가 지금 어떤 손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앉아있는지 경계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었고 

몸 안쪽에서 따뜻한 파동이 있는 무언가가 일렁~ 일렁 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분명한 점은, 그걸 느끼고 나서 갑자기 나에 대한 따뜻한 마음, 사랑스러움, 연민, 자랑스러움, 평안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는 사실이다..

자존감에 대한 책을 읽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나에 대한 사랑스러움?을 느끼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날 명상으로 하루 정도는 처음으로 나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고 내가 힘이 있는 존재,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도 명상을 꾸준히 해 볼 생각이다. 

의식적으로 원하는 때에 내 안의 에너지와 바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충분히 계속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 김승호

 

 

4장 조금은 느슨하게 함께하는 삶에 대하여

 

 

쓸데없이 칫솔질하면서

흘려보내는 물을

내 몸 중 일부를 하수구로 버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종이 한 장이 이유 없이 구겨진 채 버려지는 것을

나무의 한 생명이 제값 못하고 사라지듯

아까워해야 한다.

라면박스에 들어 있는 나무젓가락 한 개도

그 몫을 다하도록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나무가

죽어나가기 때문이다.

 

→ 사실 우리의 삶에서 평범하게 주어지는 많은 편의는 누군가 혹은 어떤 생명의 노력과 희생, 에너지가 담긴 것인데

너무 익숙하고 넘쳐나는 나머지, 그 편의를 단면만 보고 흥청망청 낭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던 글이다.

종이 한 장, 물 한 컵, 나무 젓가락 한 개... 모두 적은 돈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과연 '제 몫을 다하도록' 나는 잘 사용해 왔을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일회적으로 가치가 다했다고 쓰고 버려왔었지

하지만 너가 나고, 자연이 나고, 생명이 나고, 우주가 나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 몸 중 일부를 하수구로 버리는 것처럼

가치가 다하지 않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하수구로 버려왔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철학이나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나 스스로를 존중하는 태도의 문제다.

 

지극히 이타적인 행위가 지극히 이기적인 결과를 줄 수 있다는 원리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남을 사랑하고 배려할 이유가 충분하다. 바로 그가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동지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다.

 

영국의 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고 말했다. 관심 없다는 식의 태도를 빗대어 악을 저지르는 사람뿐 아니라 침묵하는 사람도 공범이라고도 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을 보면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인 위기에서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라고 했다.

 

1968년 어느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결국 우리는 적들이 남긴 말이 아니라, 동지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무관심과 묵인을 나무랐다.

 

→ 내내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불평만 하면서 정작 진정성 있게 알아보고, 관심 갖고, 나만의 시각을 정립하는 일에는 귀찮아해온 침묵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되어서..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싶으면 내가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하지도 않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으면 누군가 곧바로 뺏어간다. 내가 하지 않고 얻은 모든 것은 남의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으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행동하면 된다. 그래도 안 된다면 무엇을 더 바꿔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 이 글을 계속 읽었다.

참 단순하고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선 항상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서,

이 객관적인 문장조차 긍정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사실 맞다. 무슨 일이든 오래 좌절해 있을 필요가 없다.

무언갈 갖고 싶으면 살펴보고 결심하고 행동하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예외인 것 같지만 ^^

 

 

어린아이라도 남이 주는 음식은

입에 넣었다가 뱉는데,

남이 주는 생각을

덥석덥석 받아먹는 성인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받아먹기 시작하면

내 생각은 나를 대변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나의 생각을 나 스스로가 가지지 못한다면

누가 나를 존중하고 배려할 것인가.

 

내 스스로 판단하기 전에 외적인 환경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외부에서 오는 판단과 환경은 나를 망칠 수도 있고 나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고 믿지만 그러한 믿음은 위험하다.

그렇게 믿는 순간, 다른 사람이나 외부 환경의 정신적 노에로 추락한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외적인 환경이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가 허락할 때뿐임을 알고 인생의 지배권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참 나는 이런 부분이 약해서 오래 흔들렸던 것 같다.

타고 난 우유부단함.. 그리고 부족한 경험

20대야 다 비슷하지 않을까..

타인의 말에, 의견에 지배당해도 봤고, 다시 나와도 봤고,

다시 나와서도 무엇이 맞고 어떤 게 진실인지 항상 힘들어 했고...

서른즘 되니 이제 좀 주관이 생기는 것 같다.

그 느낌은 꽤 좋다.

앞으로는 오히려 너무 내 주관과 고집에 갇히지 않도록 조심해가야겠지.

 

 

솔직함이라는 가면을 쓴 무례함

 

'마음이 빠진 숨김 없는 바르고 곧음'은 날카로운 부엌칼과 같다.

상대를 위해 요리를 해줄 수도 있지만 깊은 상처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 와닿았던 이야기들인데

20대에 내가 인간관계에서 제일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어디까지 솔직하게 얘기해야 할까?"

내가 살아온 경험으론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솔직한 마음에 대해

어디까지 가감없이 말해주어야 할까?

다들 '솔직함'이 좋다고 하는데 솔직하게 얘기하면 상처를 주는 것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기준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말이 칼인지도 모르고 휘둘렀던 많은 시간들..

타인의 감정에 조금 둔했던 것 같기도 하고...... ㅜㅜ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솔직함이야말로 가장 주관적인 가치며 자신의 판단일 뿐이라고

내가 하는 말이 옳든 그르든 남에게 상처가 됐다면 따지지 말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누가 진작 좀 얘기해주지~

이제야 깨닫는 사실들~